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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나들이 4 나무에 피는 꽃/자주 보는 떨기나무

가냘픈 소녀의 초상 이스라지

이스라지      Prunus japonica Thub. var. nakaii (H.Lév.) Rehder

 

산지의 숲 가장자리에서 허리 높이 정도로 자라는 장미과의 갈잎떨기나무.

4~5월에 지름 2cm 정도의 연분홍색이나 흰색의 꽃이 1~4개씩 모여 핀다.

 

 

 

이스라지는 꽃도 아름답지만 이름 역시 그 못지않게 예쁘다.

이스라지라는 이름에는 왠지 아스라한 그리움 같은 것이 배어있다.

이슬처럼 덧없이 사라지더라도 애오라지 소박한 순정을 품은 이름이다.

 

이름이 주는 느낌처럼 이스라지는 작고 가녀린 꽃나무다.

나무라고 불러주기에는 과분할 정도로 여느 풀꽃과 별 차이가 없다.

많이 자라야 어린 아이 키를 넘지 않고 줄기는 손가락 굵기 정도다.

봄볕 따스하게 비치는 숲 가장자리나 산자락 풀밭에서 해맑은 꽃이 진 다음에는

무성한 녹음에 스며들 듯 그 존재를 찾기 어려워진다.

 

이스라지는 옛날에 앵도를 일컫던 이스랒, 이스랏, 유수라지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산에서 나는 앵도라는 뜻으로 묏이스랏, 산앵도나무라고도 했다.

서로 많이 닮은 앵도나무와 이스라지는 벚나무(Prnus)속의 나무다.

벚나무, 복사나무, 살구나무, 자두나무, 매실나무, 앵도나무 등이 모두 Prnus속이다.

 

이들은 모두 주변에서 자주 만나는 나무들로 저마다 탐스러운 열매를 자랑한다.

대체로 습도가 유지되는 계곡 주변에서 큰 나무로 성장하거나

비옥한 땅에서 유실수로 재배되어 풍성한 결실을 맺는다.

이스라지는 산지의 메마른 땅에 자리 잡는 까닭에

같은 속의 나무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가냘픈 모습으로 살아간다.

 

(김가현 님 사진)

여리여리한 줄기마다 분홍빛 머금은 하얀 꽃들이 흐드러지게 핀 이스라지의 모습에서

황순원의 대표적 단편 소나기에 나오는 소녀 주인공 윤초시댁 증손녀가 떠오른다.

 

"저기 송아지가 있다. 그리 가 보자.“

누렁송아지였다. 아직 코뚜레도 꿰지 않았다.

소년이 고삐를 바투 잡아 쥐고 등을 긁어 주는 체 훌쩍 올라탔다.

송아지가 껑충거리며 돌아간다.

소녀의 흰 얼굴이, 분홍 스웨터가, 남색 스커트가, 안고 있는 꽃과 함께 범벅이 된다.

모두가 하나의 큰 꽃묶음 같다. 어지럽다.

 

소녀는 죽기 전에 소년의 체취가 배인 그 분홍색 스웨터를 꼭 입혀서 묻어달라고 했다.

이스라지 꽃에서는 그렇게 이슬처럼 덧없이 스러져간 가냘픈 소녀의 느낌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