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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나들이 4 나무에 피는 꽃/울창한 숲의 거목들

고흐의 그림 같은 서어나무

서어나무     Carpinus laxiflora (Siebold & Zucc.) Blume

 

중부 이남의 산지에서 15m 정도 높이로 자라는 자작나무과의 갈잎큰키나무.

같은 속의 까치박달이나 소사나무에 비해 잎 끝이 꼬리처럼 뾰족하게 길다.

4~5월에 수꽃차례는 2년지에서, 암꽃차례는 새 가지에서 아래로 드리운다.

 

 

 

 

 

서어나무는 여느 자작나무들이나 참나무들처럼 수수하게 늘어진 꽃을 피운다.

그리고 꽃이 지고나서야 한눈에 알 수 있는 독특한 열매의 모습이 드러난다.

서어나무의 열매는 작은 잎 모양의 과포가 씨앗을 낱낱이 싸서 이삭처럼 달린다.

그 모양은 어릴 적에 메뚜기를 잡아서 풀줄기에 조롱조롱 꿴 모양이나

친구들과 개울에서 물고기를 잡아서 버드나무줄기에 꿴 모양과 같다. 

 

서어나무의 진면목을 본 건 뜻밖에도 단풍나무가 화려함을 뽐내던 때였다.

붉은 단풍을 즐기러갔다가 눈부시게 노랗게 물들어가는 서어나무를 만났다.

먼저 물든 노란 잎은 다시 부드럽게 홍조를 띠며 농염해지고 있었다.

우아하면서도 화려한 잎들을 거슬러 내려오면 로뎅의 조각에서 보는 

탄탄한 근육 같은 검고 억센 줄기가 지탱하고 있었다.

 

빈센트 반 고흐와 같은 위대한 화가만이 그런 걸작을 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문득 고흐가 감자 먹는 사람들을 그려서 화상(畫商)이었던 그의 동생 테오에게

팔아줄 것을 부탁하며 그림을 설명했던 편지의 몇 구절이 떠올랐다.

 

이 그림의 주변에는 짙은 황금색이나 구릿빛이 칠해져 있어야 한다.

그 그림을 제대로 보고 싶다면 부디 내 말을 잊지 말아라.

황금빛 색조와 함께 배치해야 그림이 더 잘 살아난다.

... 중략 ...

나는 램프 불빛 아래서 감자를 먹고 있는 사람들이 접시로 내밀고 있는 손,

자신을 닮은 바로 그 손으로 땅을 팠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려고 했다.

그 손은, 손으로 하는 노동과 정직하게 노력해서 얻은 식사를 암시하고 있다.

 

그곳에서 노랗게 단풍이 들어가던 서어나무가 그러했다.

서어나무의 줄기는 감자먹는 사람들의 억센 손마디와 정직한 근육을 떠올리게 했고

화려한 단풍은 고흐가 원했던 황금색이나 구리빛의 배경이 되어주었던 것이다.

고흐는 가난하고 정직한 농부들의 초라한 저녁 식사지만

그것을 화려한 황금빛 벽에 배치함으로써 황금만능의 세상에서

소박한 삶의 보람을 더 아름답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