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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나들이 5 남녘 나무에 피는 꽃/덩굴로 자라는 나무

후추등이 제대로 매웠어야...



 















후추등

Piper kadsura (Choisy) Ohwi

 

남해의 일부 섬과 제주도에 자생하는 후추과의 늘푸른 덩굴나무.

암수딴그루로 5월 하순에 술 모양의 황록색 꽃이 잎과 마주 난다.

수꽃차례는 반 뼘 길이 정도이고, 암꽃차례는 수꽃의 1/3 정도다.

11월에 붉게 익는 열매가 후추냄새가 나고 약간 맵다.

    

 

 

후추등은 매운 맛을 내는 향신료인 후추Piper nigrum와 같은 속의 식물이다.

인도 남부지방에서 나는 후추는 어느 시대에는 금보다 비싼 귀한 향신료였다.

후추를 먹지 못해 죽은 사람은 없으나, 후추를 구하려고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마젤란함대는 역사적 대항해를 하면서 네 척의 배와 선원을 잃고 마젤란도 죽었지만

마지막 남은 한 척의 배에 실린 후추를 판 대금이 그 손실을 보충하고도 남았다.


(후추등 수꽃)


그렇게 귀했던 후추는 우리나라에 자생하지 않으나 그 친척뻘인 후추등이 있다.

후추등은 거문도, 손죽도 등 남해의 몇 몇 섬과 제주도의 남쪽 해안에서 볼 수 있다.

서귀포에 있는 정방폭포로 내려가는 길옆 절벽은 온통 후추등으로 덮여 있어서

 5월에 꽃이 피면 세월호 희생자를 기리는 노란 리본이 무수히 달린 듯하다.


암수딴그루식물인 후추등은 숫그루가 암그루에 비해 열 배 그 이상 흔하다.

수꽃에 비해 3분의 1길이인 암꽃은 가을에 오디 모양의 주황색 열매꼬투리가 된다.

후추의 이름이 들어갔으니 향과 맛이 비슷하지만 매운 맛이 아주 약한 편이다.

이 후추등 열매가 제대로 매운 맛이 난다면 있을 수 없었던 역사적 사건이 있다.


(후추등의 암그루에 맺힌 열매)


서애 유성룡이 임진왜란을 겪은 다음에 후세에 경계로 남긴 징비록에 나오는 이야기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왜란 전에 조선을 정탐하려고 유즈야 야스히로를 사신으로 보냈다.

무례하기 짝이 없는 사신이었지만 그래도 외교 관례상 예조판서가 만찬을 베풀었다.

이 친구가 짐짓 술에 취한 척하면서 자리 위에 후추 알갱이를 쏟아놓으니,

기생과 악공들이 서로 다투어 후추를 챙기느라고 자리가 난장판이 되었다.

야스히로가 숙소에 돌아와 통역관에게 말하기를 너희 나라가 망하겠다.

기강이 이미 허물어졌으니 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징비록에서는 이런 지경에서 일본이 조선을 얕보고 침략을 결심했으리라고 보았다.


(꽃가루를 날리는 수꽃(왼쪽)과 길이가 짧은 암꽃(오른쪽))


그 당시 조선에서는 후추가 매우 귀한 향신료였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 시대에도 제주도에 후추등이 있었을 터인데, 그것이 제대로 매운 맛만 내었어도

일본의 버릇없는 사신이 후추 한 줌으로 우리를 농락하지 못 했을 것이고,

조선을 감히 넘보지 않았으리라고 부질없는 상상을 해보았다.

 

2018. 8.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