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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나들이 1/한여름의 숲과 들

큰제비고깔의 놀부심술

 

큰제비고깔

Delphinium maackianum Regel

 

산지에서 자라는 미나리아재비과의 여러해살이풀. 높이 1m 정도.

7~8월 개화. 꽃받침이 고깔모양으로 변형되었고 꽃잎은 고깔

안쪽에 작은 제비모양의 돌기로 변형되어있다.

한국 (전북 무주, 경기도 이북) 중국 동북 지방 등지에 분포한다.

[이명] 산제비고깔

 

 

 

 

 

 

 

오래 전에 태백산 부근에서 큰제비고깔을 처음 보았다.

제비고깔은 자료상으로 우리나라 북부 지방에 분포한다고만

나와 있고, 나는 아직 본 적이 없다.

 

꽃은 분명 고깔처럼 생겼는데 하필이면 제비고깔일까?

그 꽃에서 마땅히 제비를 떠올릴만한 단서가 보이지 않았다.

'한국식물명의 유래'(이우철, 2005.)에 '제비고깔'은

'물 찬 제비처럼 예쁘다는 데서 유래'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보아주려고 해도 별로 공감이 가지 않았다.

 

 

혹시 제비의 모습을 볼 수 있을까 해서 꽃을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여느 꽃들과는 확실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미나리아재비과 식물이 대개 그렇듯이, 보라색 고깔로 보이는 것은

꽃받침이 변형된 것이고 꽃잎은 변형되어 고깔 속에 있다.

 

꽃잎이 변형된 것은 꽃 가운데에 짙은 보라색 돌기로 보였고,

바로 그 모습이 제비의 모양을 많이 닮아 있었다.

전체 모습은 고깔 모양이고 그 속에 제비가 있어서

(큰)제비고깔이 되지 않았을까하고 짐작을 해보았다.

 

이 꽃에 벌이 달려드는 모습을 흥미롭게 관찰했다.

꽃 가운데에 작은 제비 모양의 돌기가 버티고 있어서

벌이 꽃 속으로 들이밀어 꿀을 얻기가 어려워 보였다.

벌들은 제비 모양의 돌기 아래에 감추어진 꽃술 부근에서

한참동안 비비적대다가, 꽃가루만 묻혀 가는 듯 했다.

사실 꽃 이름 때문에 그 돌기가 제비 모양으로 보이는 것이지,

이 꽃은 벌을 유혹하기 위한 암벌의 모습일 가능성이 많다.

 

(벌은 꽃 앞에서 비비적대다가 십중팔구 거로 날아간다. 꽃 속의 제비모양은 암벌 모양일 수도 있다.)

 

꿀을 얻지 못한데다가 가짜 벌에 속은 벌은 약이 올랐는지

꽃 뒤로 돌아가서 꿀 냄새가 나는 거를 붙들고 한참 씨름을 했다.

그 도굴작업도 만만치 않자 벌은 이내 포기하고 다른 꽃으로 날아갔다.

한 마디로 큰제비고깔은 꿀 냄새만 풍겨서 벌을 유혹해서

꽃가루만 묻혀가게 하는 고약한 수법을 쓰는 듯했다.

 

내 짐작이 맞다면 그야말로 놀부 심보가 아닐 수 없다.

놀부가 다리를 부러뜨렸던 제비들이 거꾸로 놀부심술을 배웠을까?

제비고깔이나 큰제비고깔이나 번성하지 못하는 걸 보면

놀부심술 같은 번식수법 때문은 아닐까 싶다.

 

 

2013. 8. 19. 꽃 이야기 2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