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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나들이 1/한여름의 숲과 들

신비의 홀아비 식물, 왕과(王瓜)

 

왕과

Thladiantha dubia Bunge

 

밭둑이나 풀밭에 자라는 박과의 여러해살이 덩굴식물.

길이 2.5m 정도. 땅속에 감자모양의 덩이줄기가 있다.

7~8월 개화. 한국,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한다.

[이명] 주먹외, 큰새박, 쥐참외, 주먹참외

 

 

 

 

 

 

왕과는 한자로 임금 왕(王), 오이 과(瓜)자를 쓴다.

영어로도 ‘왕오이’(King cucumber)라고 하는 걸 보면,

오이보다 큰 열매가 달릴 것 같은데, 실제로는 계란만하다고 한다.

열매의 크기로 보자면 ‘쥐참외’라는 별명이 딱 맞는 이름이다.

 

특별히 맛이 있거나 뛰어난 약효가 있는 것도 아닌 것을

동서양에서 ‘오이의 왕’으로 추대했으니 도무지 모를 일이다.

이 꽃이 굳이 왕관을 닮았다고까지는 생각지 않지만,

왕과의 꽃은 호박꽃이나 오이꽃처럼 털털하게 생긴

박과 식물의 꽃 중에서는 가장 조형미가 뛰어나 보인다.

 

왕과는 이상하리만치 만나기 어려운 식물이다.

야생화에 취미를 붙인지 십 년 동안 단 세 번을 만났을 뿐인데,

모두 마을 인근에서 본 것들이었고 모두 수꽃 들이었다.

이 식물이 정말 기이한 것은 암수딴그루 식물이면서,

도무지 수꽃 부근에서 암꽃을 찾아볼 수가 없는 점이었다.

암꽃과 그 열매인 ‘왕과’는 동호인들의 사진을 통해서 본 것이 전부다.

풍문에 듣기로는 우리나라에서 단 한군데, 어느 집 화단에 있었는데,

그걸 보려고 수많은 사람들이 귀찮게 찾아와서 집주인이 뽑아버렸다고 한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왕과의 암그루는 우리나라에서 사라진 것이다.

 

(옛집 담장에 자라는 왕과의 수꽃, 경북 군위)

 

‘번식과 번성은 모든 생명체의 본질’이라는 나의 믿음에 비추어,

왕과의 삶을 보면 그야말로 미스테리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이름이 ‘왕과(王瓜)’라고 하니 조선 건국과 함께

핍박받았던 고려의 왕족, 개성 왕(王)씨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그 때 왕씨 성을 가진 사람들은 임금 왕자에 한 두 획을 더해서

성을 바꾸거나 외가의 성으로 바꾸어 화를 면했다고 한다.

임금 ‘王’자에 점 하나를 찍어서 구슬 옥(玉)자를 만들고,

옆에다 두 획을 더하면 밭 전(田)자를 쓰는 성씨가 되고,

위에다 두 획을 얹어서 온전 전(全)자로 살아남은 것이다.

 

왕과와 같은 가문인 오이, 수세미, 참외, 수박이

그 효용가치에 의해서 번성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들이 필시 유전자를 한두 획 변형시켜서 살아남은

‘왕과’의 후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오이의 왕’이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초라하고 위태한 삶을 이어가고 있는 왕과를 보면서

여전히 그 이름에 숨겨진 코드를 풀지 못하고 있다.

 

 

2013. 7. 30. 꽃 이야기 2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