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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나들이 2/바닷가에 피는 꽃

번지 없는 땅에 사는 신비의 식물, 지채

 

지채

Triglochin maritimum Linne.

 

만조에 바닷물에 잠기는 곳에 자라는 지채과의 여러해살이풀.

10~25cm의 꽃줄기에 벼이삭 모양으로 꽃이 달린다.

4~9월에 개화. 연한 잎을 식용한다.

한국 등 북반구 해안에 분포한다.

 

 

 

 

어느 해 여름, 동호인 한 분이 지채를 보여주겠다고 했다.

들꽃에 취미를 붙인지 몇년 만에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지채라는 풀도 있었나?’ 하는 호기심으로 따라나선 그곳은

전라남도의 어느 한적한 바닷가였는데, 끝내 지채를 찾지 못했다.

 

그분은 얼마 전 그곳에서 분명히 지채군락을 보았다고 했다.

나는 ‘지채가 좋은 동네로 이사를 한 모양입니다’라는 말로

그의 무안함을 덮어두고 ‘지채’라는 이름만 기억해 두었다.

 

(지채 군락)

 

그 이듬해 수소문 끝에 다른 곳에서 지채를 볼 기회가 생겼다.

며칠 전에 지채를 보았다는 분에게 정확한 위치를 물어서 찾아갔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한 해 전에 겪었던 일처럼,

그곳에서도 지채를 찾을 수가 없었다.

지채란 놈은 발이 달려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식물인가?

귀신이 곡할 노릇이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한참을 찾아 헤매다가 실망을 하고 돌아서려는데

물속에서 부추 같은 풀들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불과 10분 만에 발끝까지 그 모습을 드러냈다.

가득 찼던 바닷물이 막 빠지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그 날은 바닷물이 땅으로 가장 높게 들어오는 그믐사리라서

처음에는 지채의 머리끝조차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만조가 끝나고 바닷물이 빠질 때 지채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집에 와서 한 해 전 일기장을 들추어 음력 날짜를 보니

우연히 그날도 그믐날이었고 그 바닷가를 찾았던 시간은

만조 시간이었기 때문에 지채를 만나지 못한 것이었다.

평소에 마른 땅이라도 바다가 가장 높게 들어오는 사리에

물에 잠기는 땅은 번지를 매길 수 없는 땅이다.

나는 지채에게 ‘번지 없는 땅의 식물’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지채는 아직 제대로 연구가 되지 않은 탓인지

책이나 자료마다 개화시기가 많이 다르게 나와있다.

나는 8월에 꽃을 피워 9월에 결실한 지채를 보았지만,

4,5월에 꽃을 피운 지채를 본 사람도 여럿 있었다.

그밖에 내가 이 식물에 대해 알아낸 것은 거의 없다. 

 

내년에는 번지 없는 땅에 사는 이 식물을 또 찾아 나설 것이다.

 봄에 꽃피는 동네와 가을에 꽃피는 동네가 무엇이 다른지,

가끔 바다 속으로 몸을 숨기는 속내는 무엇인지 알고 싶기 때문이다.

 

2011. 12. 28. 꽃이야기 26

 

 

 

 

다른 지역, 다른 계절에 찍은 지채의 꽃 (좌측사진 4월 말 개화 (인디카 사진), 우측사진 8월 말 개화(꽃이 진 모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