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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일기/탐사일기

2011. 4. 9 (토) 고향 동네 한바퀴

 

 

고향집에는 인터넷을 설치하지 않았다.

저녁을 먹고는 별로 할 일이 없으므로 일찍 잠을 잘 수밖에 없다.

그러면 새벽 4시에 잠이 깨고... 마땅히 갈 곳이 없어서

그 흔한 일출 풍경을 담으러 갔다.

 

 

수면에 옅은 안개가 끼어서 해가 조금 떠오른 다음에야 볼 수 있었다.

그저 그런 일출을 보고 아침 식사 전에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은 작은 집에서 배추 모종 5,000포기를 심는 날이다.

삼촌과 숙모, 어머니, 그리고 7촌 숙모가 모종을 심는데 모두 70을 넘긴 분들이다. 

내 몰라라하고 나갈 수가 없어서 오전 내내 배추 심는 옆에서 거들었다.

다리가 시원찮아서 젊은 사람이(? ㅎㅎㅎ) 제대로 노동력을 제공하지 못했다.

 

 

어제 대구 부근에서 무리를 한 탓일까. 다친 다리가 영 시원찮다.

할 수 없이 사흘 전에 봐 두었던 등대풀을 찍으러 바닷가로 갔다.

 

 

등대풀은 대극과의 식물이다.

대극과의 식물들은 아주 복잡한 꽃차례를 가지고 있는데

자세히 들여다 봐도 3차 방정식처럼 해석이 잘 안되는 꽃차례다.

 

 

돌아오고 나서 좀 아쉬운 것은 꽃차례 하나를 접사를 해볼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성을 들여서 보아도 알까말까 한 것을 이렇게 한가한 모양새나 찍고 있었다.

 

 

여기 잡힌 벌 한 마리는 등대풀에 앉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 부근에 많이 피어있는 민들레를 찾아 날아가는 길인데 우연히 카메라에 들어온 것이다.

벌이 등대풀의 매개곤충으로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이 사진은 좋은 사진이 아니다.

 

 

이 기와집은 50여년 전까지만해도 아버지와 고모들이 다니던 서당이었다.

낡은 집이었지만 문화재 복원 예산으로 지붕을 보수해 놓았다.

 

 

우리집 담장에 핀 민들레... 자세히 보니 토종은 아니었다.

 

 

몇 걸음 아래 내가 어릴적 살던 집이 있다.

지금은 작은 숙부 내외분이 살고 계시다.

이 집 아래채 부엌 문짝에... 내 어린 시절의 흔적이 여지껏 남아있다.

내 어릴적에는 모두 가난하게 살아서 나는 10살 때까지 사진에 찍힌 적이 없다.

이 글씨는 내가 7살 때 페인트로 쓴 것이다.

이것이 내 삶의 가장 오래된 흔적이다.

 

 

그 무렵 동네 이장을 하시던 아버지가 면에서 하얀 페인트 한 홉 정도를 받아 오셨다.

동네 입구 큰 바위에 동네 이름을 쓰기 위한 페인트였는데, 내가 여기에 개시해버린 것이다.

 

그 옆에 보니 笑門萬福來, 建陽多慶 등의 입춘첩 글씨가 아직도 붙어있다.

아버지가 창호지에 먹으로 쓴 글씨인데..

 50년이 흐르면서 창호지는 벌써 없어지고 먹의 흔적만 남아있다.

이 글씨를 쓰던 때가 내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지 싶다.

이런 입춘첩을 써 붙이던 여유로운 농경생활은 그 후로 집안이 어려워지고

산업화의 무한경쟁시대에 휩쓸리는 역사의 급류 속에서 영원히 멀어져 갔다.

 

집 옆 공터에 냉이들이 지천으로 피어 꽃대를 올리고 있다.

냉이가 꽃대를 올리면 뿌리에 알이 박혀 못먹는다고 한다.

동네에 70노인분들만 사시니 냉이는 캐는 사람도 없이 온 들판을 덮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