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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나들이 4 나무에 피는 꽃/주변의 큰키나무

창호지를 새로 바르며

꾸지나무            Broussonetia papyrifera (L.) L'Hér. ex Vent.

 

마을 주변이나 숲 가장자리에서 3~12m 높이로 자라는 뽕나무과의 갈잎큰키나무.

잎은 갈라지지 않거나 깊게 갈라지는 등 변이가 심하고 뒷면에 털이 많이 난다.

암수딴그루로 5~6월에 암꽃차례는 구형, 수꽃차례는 막대모양으로 달린다.

 

 

고향집에 거센 태풍이 밤새 몰아치던 날이 있었다.

큰 바람에 피해를 입을 만한 것들을 갈무리해 놓고도 잠을 설치면서 노심초사했다.

아침에 보니 심각한 피해는 없었으나 창호지가 대부분 떨어져서 펄럭이고 있었다.

밤새 비가 들이치면서 창호지를 붙인 풀을 눅눅하게 하고 바람이 밀어붙인 듯했다.

 

창호지가 곧 떨어져 나갈 듯 펄럭대는 모습만으로는 귀신이라도 나올 듯했다.

아버지는 어차피 문을 새로 바를 때도 되었는데 태풍이 거들어줬다면서 좋아하셨다.

창호지는 해마다 눅눅한 여름이 지나고 나서 새것으로 바르는데 붙이는 일보다

묵은 종이를 창살에서 깨끗하게 떼어내는 일이 몇 배나 손이 많이 가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창호지를 붙이면서 문득 언젠가 읽은 문구멍이라는 동시가 떠올랐다.

 

빠꼼 빠꼼 / 문구멍이 / 높아간다

아가 키가 / 큰다

(신현득. 1959년 발표)

 

나와 동생들도 분명 창호지에 빠꼼 빠꼼 구멍을 내면서 자랐을 것이다.

그 시절에는 창호지가 한 해를 넘기지 못했지만 요즈음은 두어 해 걸러 붙인다.

짱짱한 가을볕에 마른 새 창호지를 손가락으로 살짝 튕기면 탱탱 소리가 난다.

 

(꾸지나무)

창호지는 문에 바르는 종이라는 뜻이고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한지'다.

한지는 닥나무 줄기를 잘라 껍질을 쪄서 벗기고 다듬어 얻은 섬유로 만든다.

농가에서 여름에 닥나무 껍질을 손질해서 말려놓으면 종이 장사가 와서 수집하면서

저울로 달아 그 무게에 해당하는 만큼 한지로 바꾸어주었다.

 

그런데 그때는 그냥 닥나무로 알았던 것이 요즘 자세히 보니 꾸지나무였다.

꾸지나무는 암수딴그루, 닥나무는 암수한그루인 걸 빼고는 큰 차이가 없어서

그 시절 시골에서는 굳이 닥나무와 꾸지나무를 달리 부르지 않았던 듯하다. 

어쩌면 한지를 생산하는데 정말 많이 기여한 건 닥나무가 아니라 꾸지나무였는지도 모른다.

내 고향에서도 그랬고 다른 지방에서도 닥나무보다는 꾸지나무를 훨씬 많이 만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지는 닥나무로 만든다는 상식은 꾸지나무에게는 좀 억울한 면이 있을 것 같다.

 

(꾸지나무의 암꽃차례(왼쪽)와 수꽃차례(오른쪽))

아버지와 함께 창호지를 바르면서 떠오르는 추억들이 많았다.

아버지는 한지를 손수건 크기로 잘라 엽전을 싸서 제기를 만들어 주셨고

겨울에는 방패연이나 가오리연을 만들어 주셨다.

봄이 오면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을 써서 대문에 붙이셨다.

세월이 흐를수록 주변에서 멀어져가는 한지를 대신해서 

산자락에서 만나는 꾸지나무가 그 추억을 불러주리라.

 

 

 

 

 

닥나무        Broussonetia kazinoki Siebold & Zucc.

 

마을 주변이나 숲 가장자리에서 2~6m 높이로 자라는 갈잎떨기나무.

암수한그루로 꾸지나무보다 한 달 정도 빠른 4~5월에 꽃이 핀다.

암꽃차례는 위쪽에, 수꽃차례가 아래쪽에 모두 공 모양으로 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