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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나들이 4 나무에 피는 꽃/북방 높은 산의 나무

어느 여승을 닮은 백산차

백산차   Ledum palustre var. diversipilosum Nakai

 

개마고원과 백두산 일대에서 무릎 높이 남짓 자라는 진달래과의 늘푸른떨기나무.

잎은 좁은 피침형 또는 장타원형이고 6~7월에 지름 6mm 정도의 꽃이 모여 핀다.

잎의 폭에 따라 왕백산차, 좁은백산차 등으로 구분했으나 근래에 통합되는 추세다.

 

 

 

 

김일엽(金一葉)은 한 때 조선의 신여성, 여성해방과 자유연애의 아이콘이었다.

그녀는 불처럼 타오르던 사랑을 이루지 못하자 자살이냐 타락이냐의 기로에 선다.

그 갈림길에서 만공스님을 만나 삭발을 한 후 수덕사의 여승이 되어 일생을 마쳤다.

 

문인이었던 그녀에게 만공스님은 다시는 글을 쓰지 말라는 계()를 내렸다.

그러나 30년 후 일엽은 토해내지 않고는 눈감지 못할 인생고백과 같은 수필집을 낸다.

그 책 청춘을 불사르고의 머리말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타락이냐, 자살이냐?’의 분기점에서 맘 붙일 데 없이 헤매던 나는 그때 가장 위험한 생명체였던 것이다.

천우신조! 이때 나는 다행히 만사를 해결할 수 있는 불법(佛法)을 만났다.

 

이 무렵 스님의 표현처럼 가장 위험한 생명체와 같은 여인이 또 있었으니

여성으로서는 조선 최초의 서양화가 나혜석과 역시 최초의 성악가 윤심덕이었다.

일엽과 동갑이었던 나혜석 역시 수덕여관에 머물며 만공스님께 출가를 간청했으나

너는 중이 될 사람이 못 된다며 거절을 당하고 행려병자로 비극적 삶을 마치게 된다.

그 몇 해 전에는 스스로 작사한 사의 찬미’를 불렀던 윤심덕이 현해탄에서 사라졌다.

 

백산차를 처음 만났을 때 그 수덕사의 여승이 떠올랐다.

백산차는 진달래과의 식물인데 눈처럼 흰 꽃이 피고 향기가 아주 짙다.

온 산에 불 붙듯이 핀 진달래가 청춘이라면 백산차는 청춘을 불사르고하얀 재가 된 진달래다.

그 잎에서 나는 높은 향기는 어쩌면 뜨겁던 사랑의 회한과 고뇌를 정화시킨

일엽(一葉)의 카타르시스와 같은 향기를 닮지 않았을까.

 

백산차(白山茶)는 백두산에서 나는 향기로운 차라는 이름이다.

엄혹한 환경에서 살면서도 늘푸른잎으로 겨울을 나며 깊은 향을 지니고 있다.

백산차는 개마고원과 백두산 그 이북에 분포하는 아한대 식물이다.

국내에서는 백두대간과 낙동정맥을 따라 백산차를 닮은 꼬리진달래가 핀다.

꼬리진달래 역시 좋은 향기를 지니며 꽃차례는 백산차와 아주 비슷하다. 

 

생사의 기로에서 스님은 분명 그 때 진달래에서 백산차로 돌연변이를 일으킨 것 같다.

천우신조의 불법을 만나 변이를 일으키지 못했더라면 남은 생을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시대를 앞서가던 여인들이 벼랑끝과 같은 냉엄한 현실 앞에 섰을 때

두 여인은 붉은 진달래인 채로 낙화했고 일엽은 하얀 백산차로 환생했다.

 

 

2020. 8. 31.

 

 

 

꼬리진달래     Rhododendron micranthum Turcz.

 

강원, 경북, 충북의 바위지대 및 건조한 사면에 분포하며 1~2m 정도 자란다.

잎은 길이 2~4cm의 좁은 타원형이고 잎 뒷면에 갈색의 비늘털이 밀생한다.

6~7월에 지름 7mm 정도의 깔때기모양의 꽃 10~20개가 가지 끝에 모여 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