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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나들이 4 나무에 피는 꽃/낮은 숲을 이루는 나무

비오는 날의 향기 누리장나무

누리장나무        Clerodendrum trichotomum Thunb.

 

중부 이남의 숲 가장자리에서 2~5m 정도 자라는 마편초과의 갈잎떨기나무다.

7~8월에 가지 끝부분에 꽃이 달리며 열매는 10~11월에 짙은 남색으로 익는다.

 

 

 

 

 

안개비 내리던 어느 날 산길에서 짙은 백합 향기를 느꼈다.

사방을 두리번거려도 향기의 근원을 찾기가 어려웠다.

저만치 누리장나무 꽃이 보였는데 설마 그 향기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달콤하고 신선한 향기를 따라가 보니 놀랍게도 그 꽃이 뿜어내는 향기였다.

 

누리장은 냄새가 누리다는 이름이고 냄새오동(臭桐)이라고도 한다.

그 누린내는 같은 마편초과의 누린내풀에서 나는 것과 비슷한데

아주 거북하지는 않으나 분명 상쾌한 냄새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런데 안개비가 무슨 마법을 부렸는지 누린내가 백합꽃 향기로 변했다.

굳이 마법의 비밀을 풀어보자면 빗물이 잎과 줄기의 누린내는 씻어 내리고

흐린 날의 묵직한 대기가 꽃향기를 더욱 오래 머물게 잡아두는 듯했다.

 

 

누리장나무 꽃에는 백합꽃이나 나리꽃을 쏙 빼닮은 곳이 또 있다.

바로 짙은 자주색 꽃밥 덩어리를 달고 있는 긴 수술이다.

그런 크기와 모양의 꽃술은 대개 호랑나비나 제비나비 같은 큰 나비들을 위한 것이다.

수술 끝에 달린 꽃밥은 진공청소기의 헤드처럼 회전하면서 나비 날개에 꽃가루를 부빈다.

 

누리장나무의 꽃술은 나리의 것과는 달리 암술과 수술이 시간차를 두고 자란다.

먼저 수술 네 개가 우뚝 서서 꽃가루를 나비에게 전하는 수꽃 역할을 한다.

그동안 암술은 밑에 처져있다가 수술이 꽃가루를 털어내고 오그라들면

그때 바로서서 다른 꽃의 꽃가루를 받을 준비를 한다. 이때는 암꽃의 시간이다.

암술과 수술의 성장 시기를 다르게 해서 자화수분을 방지하는 꽃이 더러 있지만

이 꽃은 꽃술이 길어서 그들의 역할 교대를 더 뚜렷하게 볼 수 있다.

 

(수술 4개가 올라와 있는 수꽃 시기와 암술 1개만 서 있는 암꽃 시기가 보인다.)

수분 후에 꽃은 사라졌다가 가을에는 다섯 장의 꽃받침이 빨갛게 물들어 또 다른 꽃이 된다.

그때는 가운데에 검은 사파이어처럼 반짝이는 열매를 담아 새들을 유혹한다.

 

누린내 때문에 멀리 했던 나무가 어느 비오는 여름날의 우연한 만남으로 가까워졌다.

그 고혹적인 향기 때문인지 꽃도 한결 우아하고 매력적으로 보였다.

데면데면하던 사람들과 친해지려면 비오는 날 조용한 찻집이나 술집에서 만날 일이다.

그러한 날에 차 한 잔이나 술 한 잔 나누노라면 또 다른 사람의 향기를 느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