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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나들이 4 나무에 피는 꽃/울창한 숲의 거목들

피나무의 수난시대

피나무 Tilia amurensis Rupr.

 

전국의 산지에 분포하는 갈잎큰키나무로 높이 25m, 지름 1m 정도 자란다.

6~7월에 잎겨드랑이에서 5cm 정도의 포와 함께 3~20개의 꽃이 달린다.

 

 

 

 

 

1980년대 중반에 동부전선 민통선 부근의 중대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전임 중대장이 떠나면서 한 가지 부탁 겸 솔깃한 제안을 해왔다.

어느 골짜기에 거대한 피나무를 베어놓았으나 마땅한 수단이 없어서 가져오질 못했는데,

적당한 기회에 그걸 운반해 와서 절반만 나눠 달라는 것이었다.

드럼통을 7개 정도 이어놓은 크기로 그 정도면 바둑판 열 개가 넉넉히 나온다고 했다.

 

우선 정찰을 나가봤더니 깊고 가파른 골짜기에 아름드리 피나무가 쓰러져있었다.

그걸 차가 다니는 길까지 끌어올리려면 최소한 30명의 병력이 필요하고,

나무와 인원을 수송하려면 트럭 두 대가 해발 980미터의 험한 산길을 올라가야 했다.

무모할 정도로 위험한 일이라는 판단을 하고는 피나무 바둑판을 단념했다.

 

 

비록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으나 유혹에 흔들렸던 그 마음마저도 부끄럽다.

군 본연의 임무에 대한 심각한 일탈이라는 윤리의식이 부재했던 것이다.

군대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사회적 분위기도 대체로 그러했던 것 같다.

그 무렵 전방 오지의 대명사였던 강원도 인제, 원통 거리를 지나노라면

피나무 바둑판을 판다는 간판을 내건 목공소와 가게가 즐비했으니 말이다.

 

피나무가 바둑판이나 목공예품의 소재로 그런 수난을 겪는 까닭이 있다.

 재질이 단단하고 치밀하여 섬세한 형상을 만들 수 있으면서도 의외로 가볍다.

나무가 잘 트지 않고 목재의 무늬와 색상이 우아하고 은은한데다

나이테가 거의 보이지 않기 때문에 바둑판으로 만들기도 안성맞춤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상자도 피나무로 만들었다고 하니 얼마나 대단한 목재인가.

 

유월이 되면 울창한 숲에서 찾아내기가 어렵던 피나무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약간 노란색이 도는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멀리서도 잘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피나무는 수많은 벌들이 꿀을 얻어가는 훌륭한 밀원식물이기도 하다.

 

피나무는 껍질을 뜻하는 피에서 유래한 이름이 분명하다. 

길고 질긴 껍질의 섬유질로 튼튼한 밧줄과 삿자리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고향마을에서도 가뭄에 네 사람이 두레 줄을 잡고 개울물을 농수로에 퍼 올릴 때

새끼줄은 약해서 피나무 껍질로 튼튼한 밧줄을 꼬아서 썼다.

 

피나무는 오랜 세월 섬유와 목재, 꿀로 인간에게 그렇게 아낌없이 베풀었다.

역설적으로 그 베풂은 껍질이 벗겨지고 아름드리가 베어지는 수난사였다.

 

2020. 6. 24.

 

 

 

 

 

 

 

찰피나무       Tilia mandshurica Rupr. & Maxim.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의 산지에 분포하며 피나무와 비슷하다.

피나무에 비해 잎과 포가 약간 큰 편이고 꽃은 황백색을 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