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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나들이 4 나무에 피는 꽃/자주 보는 떨기나무

생활속 거리두기의 모범 고광나무

 

고광나무 Philadelphus tenuifolius Rupr. & Maxim.

숲 가장자리에서 2~3m 정도 높이로 자라는 수국과의 갈잎떨기나무.

5~6월에 가지 끝에서 지름 2.5cm 정도의 꽃이 피고 꽃잎은 4장이다.

 

 

 

오월에 꽃 피는 나무들 열에 아홉은 흰 꽃이 핀다.

층층나무말발도리, 이팝나무말채나무, 백당나무, 고추나무, 때죽나무, 쪽동백...

이 계절에 흰 꽃이 피는 나무는 열 손가락으로 두 번씩 더 꼽아야 한다. 

곤충들의 눈에도 녹색 숲에서는 흰색 꽃이 가장 눈에 잘 띄는 까닭이리라.

 

고광나무 Philadelphus schrenkii 역시 오월에 하얀 꽃이 피는 나무로, 

앞에 열거한 여느 나무들보다 꽃이 커서 진달래꽃 크기만 한데,

넉 장의 꽃잎이 얼핏 보면 나비들이 앉아있는 모습 같기도 하다.

이 나무는 꽃이 지고나면 비로소 범상치 않은 줄기의 모습이 드러난다.

아무래도 그것이 다른 나무들에 비해 큼직한 꽃을 피우는 비결인 듯하다. 

 

(국내에 주로 자생하는 종은 고광나무에 비해 암술대가 얕게 갈라지며

암술대에 털이 없는 얇은잎고광나무P. tenuifolius 인데,

실제로는 두 종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차이가 미세하므로,

이 글에서는 계속 ‘고광나무’의 이름을 쓰기로 한다. )

 

 

두 갈래로 가지를 내면서 자라는 나무는 흔하지만

고광나무는 다른 나무들에 비해 그 가지치기가 놀라울 정도로 규칙적이고 반듯하다.

원줄기에서 두 줄기 가지를 내자면 360도를 똑같이 셋으로 나누는 120도가 이상적이다.

그 각도로 가지를 치면 잎과 꽃을 내는 공간이 가장 넓고 균등하게 된다.

자라는 환경에 따라 그 각이 좁아지기도 하고 가지의 길이가 달라지기도 하지만

제대로 잘 뻗은 고광나무의 줄기를 보면 그 기하학적 정교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몇 달 코로나19 때문에 사회적 거리두기생활속 거리두기라는 말이 귀에 익었다.

고광나무는 가지를 넓게 벌려 꽃과 잎의 배열이 넉넉하니 생활 속 거리두기의 모범이라 할만하다.

그렇다면 고광은 이렇게 넓게 가지를 벌린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광나무의 이름을 한자로 표기한 자료는 찾지 못했으나 만약 사타구니 자에

넓을 자로 쓴다면 가랑이가 넓은 나무, 즉 가지를 넓게 벌리는 나무가 된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다 보니 유방劉邦을 도와 한나라 건국의 대업을 이룬

한신韓信장군이 청년시절에 겪었다는 과하지욕胯下之辱의 고사가 떠오른다.

그가 출세하기 전에 저자거리 불량배의 사타구니 밑을 기어갔다는 유명한 일화다.

여기에 등장하는 사타구니 는 경우에 따라 로도 읽는데,

바로 이 경우처럼 과광으로 읽기가 거북해서 고광이 되지 않았나 싶다.

 

고광나무라는 의미가 가랑이가 넓은 나무라는데 공감한다면

모든 꽃들이 사라지고 잎마저 떨어져 쓸쓸한 겨울산행에서도 흥미로운 볼거리가 생긴다.

여러 고광나무들 중에서 가장 단정한 가지를 찾아보는 것도 소소한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2020. 6.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