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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나들이 4 나무에 피는 꽃/덩굴과 아주 작은 나무

숲속의 관현악단 등칡



등칡           Aristolochia manshuriensis Kom.

 

산지 계곡이나 너덜지대에서 자라며 10m 정도 덩굴을 뻗는다.

4~5월에 잎겨드랑이에 길이 5cm 정도의 양성화가 1~2개 달린다.

주로 강원도와 영남지방의 산지에 드물게 분포하는 편이다.

    


 


십여 년 전에 신록이 짙어가는 산길에서 처음 보는 덩굴식물을 만났다.

그곳은 경북 영덕군과 포항시의 경계에 있는 동대산 서쪽 계곡이었다.

야생화를 즐겨 찾는 이들에게 처음 만나는 꽃은 참 반가운 선물이지만

그 이름을 불러줄 수 없을 때는 약간의 미안한 마음도 없지 않다.

색소폰처럼 꼬부라진 꽃들이 조롱조롱 달린 그 덩굴의 이름은 등칡이었는데,

꽃벗들과 함께하지 않았었더라면 이름조차 모른 채로 돌아올 뻔 했다.

계곡 비탈에 넓게 펼쳐진 등칡의 무리는 대규모 관현악단처럼 느껴졌다.



등칡이라는 이름으로만 보면 칡의 친척뻘 쯤 되는 식물로 생각되기 십상이다.

줄기의 느낌은 등나무고 전체적인 모습이나 잎 모양은 칡과 많이 닮았다.

등나무나 칡을 닮았다는 이름인 건 분명해 보이나 그들과 같은 콩과식물은 아니다.

등칡의 꽃 모양을 유심히 보면 쥐방울덩굴과 가까운 식물임을 짐작케 한다

 

쥐방울덩굴과에는 풀꽃인 족도리풀 종류와 쥐방울덩굴이 있고 등칡은 덩굴성나무인데,

잎 뒷면에 나비들이 알을 낳고 애벌레가 그 잎을 먹으며 자라는 공통점이 있다.

족도리풀에는 애호랑나비, 쥐방울덩굴에는 꼬리명주나비, 등칡에는 사향제비나비가 알을 낳는다.

애벌레들은 이들을 먹고 자라지만 정작 나비가 되어서는 어떤 보답도 하는 것 같지는 않고,

이 식물들의 꽃에는 대개 파리 종류들이 들어가서 수분을 한다고 한다.



등칡을 처음 만났을 때로부터 몇 해가 지난 어느 날 제법 기특한 생각을 해냈다.

등칡꽃이 핀 앞에서 휴대전화로 아름다운 교향곡들을 들어 보자는 생각이었다.

절대음감이 형편없을 뿐만 아니라 악기의 음색도 구별하지 못하는 내가

격조 높은 연주회에 가는 건 사치라고 생각해 오던 터였다.

도시에서 별로 살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럴 여건도 되지 못했다.


낙동정맥의 줄기인 동대산 계곡은 내 고향집에서 한 시간 이내의 거리에 있었다.

등칡의 꽃은 관악기가 되어주었고 무수한 줄기들은 현의 소리를 냈다.

넓적한 잎들은 이따금 등장하는 심벌즈가 되어주었다.

멋진 연미복차림의 사향제비나비가 카라얀처럼 우아하게 악단을 지휘했다.

등칡 교향악단의 연주에는 현악의 선율이 간지러운 비발디의 사계보다는

관악기에서 내뿜는 소리가 장쾌한 개선행진곡이나 경기병서곡이 썩 어울렸다.

오월 어느날의 자연교향악단 연주는 내가 나에게 준 귀한 선물이었다.


2019. 12.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