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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나들이 1/눈녹은 산과 계곡

내가 뽑은 군자(君子), 보춘화

 

보춘화

Cymbidium goeringii (Rchb.f.) Rchb.f.

 

산지의 숲에 사는 늘푸른잎의 여러해살이풀. 높이 20~30cm.

3~4월 개화. 꽃은 줄기 끝에 한 송이씩 달린다.

한국, 일본, 중국 등지에 자생하며, 우리나라에서는 안면도와

포항을 연하는 선이 북방한계선으로 알려져 있으나,

서해안의 섬들을 따라 경기도 지역까지 분포한다.

[이명] 춘란(春蘭)

 

 

 

 

 

 

보춘화(報春花)는 '봄을 알리는 꽃'이라는 뜻이다.

이 꽃 이름에서는 전근대적인 불평등주의가 엿보인다.

보춘화 이전에 이미 여남은 가지의 꽃이 봄을 알려 줬는데,

그들은 꽃도 아니라고 무시해버린 정황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옛사람들이 꽃에다 굳이 차별을 두려하지는 않았겠지만

자잘하고 볼품없는 꽃들은 이름조차 받지 못했고,

지방마다 민초들끼리 부르던 서러운 이름들만 전해온다. 

 

반면에 특별히 귀하게 여겨진 꽃이나 식물들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四君子, 즉 梅, 蘭, 菊, 竹이다.

이들은 혹독한 추위에도 푸르고 꼿꼿한 기상을 지니고

눈과 서리를 맞으면서도 꽃을 피우는 기개 높은 식물들이다.

 

단순히 생각하면 그럴듯한 명단이라고 넘어갈 수 있지만,

우리나라의 난이 백여 종이 넘는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사군자의 하나로 칭송받던 蘭은 무슨 난초인지 궁금해진다.

군자의 품격에 미치지 못하는 난들도 많기 때문이다.

잡초처럼 함부로 사는 난이 있고, 여름 한철만 반짝하는 난,

난(亂)하게 사는 난, 보이지도 않는 자잘한 난들이 그들이다.

 

 

'춘란'(春蘭)이 라고도 부르는 보춘화는

푸른 잎으로 겨울을 나서 이른 봄에 꽃을 피운다.

이러한 까닭으로 나는 이 보춘화가 사군자 중의 ‘蘭’으로 여겨왔었다.

언젠가 蘭에 대해 식견이 높으신 분에게 여쭈어 보았더니

四君子로 대접 받는 蘭은 중국이 원산인 ‘혜란’(蕙蘭)이라고 한다.

 

처음 듣는 이름이라서 혜란에 대해 더 설명을 들어보았더니,

한 꽃대에 하나의 꽃이 달리는 것, 즉 一莖一花는 蘭이라고 하고,

한 꽃대에 여러 개의 꽃이 달리는 것, 一莖多花는 蕙라고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蕙’의 뒤에 ‘蘭’이 붙어서 蕙蘭이 되었다고 한다.

 

사실 혜란이 사군자로 대접을 받았으리라고 추측할 따름이지

꼭 이것만이 군자의 자격이 있다고 명시해놓은 곳도 없고,

우리의 자생란도 아니므로 오히려 부적격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므로 나의 사군자 명단에는 ‘보춘화’를 넣으려고 한다.

초야에 묻혀서 푸른 잎으로 춥고 긴 겨울을 난 보춘화가

겨우내 집안에서 보살핌을 받은 혜란보다 군자답기 때문이다.

 

2010. 4. 1.   꽃 이야기 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