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꽃나들이 1/눈녹은 산과 계곡

세 얼굴의 여인 얼레지

 

얼레지

Erythronium japonicum (Balrer) Decne.

 

산 속 비옥한 땅에 무리지어 자라는 백합과의 여러해살이풀.

높이 10~20cm. 잎자루는 땅속에 있으며 지상에는 잎몸만

노출되어 있다. 3~4월 개화. 잎을 식용한다.

한국(전역), 일본, 중국 동북 지방 등지에 분포한다.

[이명] 가재무릇, 엘레지

 

 

 

 

 

얼레지는 하루에 세 번 모습이 변한다.

아침에는 다소곳이 꽃잎을 오므린 열여섯 소녀였다가

낮에는 꽃잎을 활짝 뒤로 열어젖힌 열정의 여인이 되고,

황혼 무렵에는 엘레지의 주인공처럼 슬픈 모습이 된다. 

 

얼레지는 봄볕이 따뜻해지면 꽃잎을 한껏 열어젖힌다.

그 모습은 치마가 활짝 들쳐진 마릴린 몬로의 요염이고,

치맛자락을 쳐들고 다리를 번쩍번쩍 들어 올리는 캉캉무희다.

청순한 소녀가 이렇게 변신하는데 30분이 걸리지 않는다.

이런 모습에서 '바람난 여인'이라는 꽃말을 얻었지 싶다. 

 

 

얼레지는 잎에 얼룩이 있어서 얼레지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옛날 도감 중에는 얼레지를 '엘레지'로 쓴 책이 있고

또 어떤 자료에는 얼레지의 이명이 '엘레지'라고 나와 있다.

이 엘레지라는 말도 두어 번은 짚고 갈만한 묘미가 있다.

 

국어사전에는 '엘레지'는 구신(狗腎)으로 뜻풀이가 되어있다.

그 꽃봉오리의 색깔과 크기가 수캐의 거시기와 아주 닮아서

'얼레지'와 다른 의미로 '엘레지'라는 이름을 얻은 듯하다.

영어권에서는 얼레지를 'Dogsteeth'라고 부른다.

꽃 가운데의 짙은 자주색 무늬가 개의 치아를 닮았는데,

이 무늬는 곤충을 꿀샘으로 안내하는 유도선이라고 한다.

 

우리말 '엘레지'와는 관련이 없는 불어의 '엘레지(Elegie)'는

슬픈 노래(悲歌)나 죽은 사람을 연모하는 노래이다.

발음이 비슷한 탓인지 얼레지에는 엘레지의 슬픔도 보인다.

소월의 시 '진달래 꽃'의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란 대목에서 

분홍색 꽃잎이 즈려 밟히는 비장미(悲壯美)가 얼레지에도 내재하는 듯하다.

 

 

얼레지에는 청순하고 어여쁜 처녀의 모습이 보이는가 하면,

봄꽃의 여왕이라는 찬사 뒤로 바람난 여인이라는 소문도 있고,

눈비 맞고 시든 모습은 버림받은 여인 같기도 하다.

 

얼레지에는 이처럼 복잡미묘한 여인의 모습이 혼재한다.

청순함 뒤에 감추어진 열정, 우아함으로 포장한 천박함,

화려한 날의 환희와 모든 것이 지나간 다음의 비련...

얼레지의 모습에서 그런 이중성들이 보인다.

 

 

2013. 3. 2. 꽃 이야기 1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