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죽나무 Styrax japonicus Siebold & Zucc.
중부 이남의 산지에서 5~10m 높이로 자라는 때죽나무과의 낙엽 소교목으로,
5~6월에 새가지 끝에서 지름 2.5cm 정도의 양성화가 3~6개씩 모여 달린다.
꽃이 만개한 때죽나무 아래는 순결한 짐승이나 언어가 생기기 전,
태초의 남녀의 사랑의 보금자리처럼 향기롭고 은밀하고 폭신했다.
... 중략 ...
나는 그가 머뭇거리지 못하게 얼른 그의 손에서 길 잃은 피임기구를 빼앗아
내 등 뒤에 깔고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내가 눈을 떴을 때 내 눈높이로 기남이의 얼굴이 떠오르든
때죽나무 꽃 가장귀가 떠오르든 나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박완서의 단편 「거저나 마찬가지」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주인공 영숙은 인생의 지극한 순간을 위해 때죽나무 그늘 밑을 봐 둔 듯하다.
그 열락의 시간에 수많은 하얀 꽃들이 눈처럼 나부끼며 감미로운 향기를 뿌렸으리라.
소설의 주인공은 분명 사람이었으되 꽃쟁이인 내게는 때죽나무가 주인공이고
그 꽃그늘 아래의 두 남녀는 소품처럼 여겨졌다.
나는 오월에 하얀 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이 나무를 어찌 표현할 언어를 찾지 못했으나,
박완서 작가는 그 아래에 두 남녀의 정사를 연출함으로써
때죽나무의 순결하고도 황홀한 이미지를 영원히 잊을 수 없도록 각인시키고 있다.
이런 대목에서 한 시대를 풍미한 거장의 노작에 경탄하며 갈채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이 장면이 상상 속에 깊이 새겨진 후에는 때죽나무가 어쩌고 하는 소리는 사족蛇足이다.
굳이 한마디 보태자면, 물고기를 떼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이름의 유래설이다.
역시 항간에 꽤나 알려진 이야기로, 이 나무의 잎과 열매에 마취성분이 있기 때문에
찧어서 물에 풀면 고기들이 기절을 해서 떼죽음을 당한 듯이 물 위로 떠오른다는 이름이다.
같은 과의 비슷한 식물인 쪽동백도 같은 성분이 있어서 물고기를 잡을 수 있다고 한다.
때죽나무의 영어 이름인 스노우벨(snowbell)도 상당히 운치 있는 이름이다.
이 이름에서 나무 전체가 눈을 뒤집어 쓴 듯 꽃 피웠다가
시든 기색도 없이 눈송이처럼 나부끼며 떨어지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이제는 화사하게 핀 때죽나무를 보면 문득 박완서와 영숙과 기남이 떠오를 것 같다.
하얀 눈이 축복처럼 쏟아지는 낙화의 장면이 그려지는 서양의 이름이나,
물고기들이 기절한다는 이름 역시 두 남녀의 그 은밀한 시간에 완전하게 어울린다.
인문학의 향기는 그렇게 이야기를 만들어 주고 이 땅의 꽃을 더욱 살갑게 해 준다.
2019. 12. 10.
쪽동백나무 Styrax obassia Siebold & Zucc.
낮은 산지에서 10~15m 정도 자라는 때죽나무과의 갈잎나무다.
5~6월에 새가지에서 나온 긴 꽃차례에 지름 3cm 정도의 꽃이 핀다.
때죽나무에 비해 잎이 훨씬 크고, 꽃차례에 꽃이 많이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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