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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나들이 5 남녘 나무에 피는 꽃/풀꽃처럼 작은 나무

사면초가 위기의 시로미



















 

시로미

Empetrum nigrum var. japonicum K.Koch

 

한라산의 높은 지대에서 한 뼘 높이로 자라는 시로미과의 늘푸른떨기나무.

4월에 줄기 윗부분에 꽃이 피며 열매는 5~6월에 흑자색으로 익는다.

암수딴그루로 꽃이 필 무렵 암그루의 잎은 녹색, 숫그루는 붉은색을 띤다.




 

반세기 전의 한라산에는 지금보다 훨씬 다양한 식물들이 살았다고 한다.

1970년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후 한라산 생태계는 조릿대의 창궐로 황폐해졌다.

오랫동안 한라산을 지켜본 사람들은 섣부른 국립공원 정책이 부른 참사라고 하며, 

국립공원 내에서 말 방목을 금지한 후에 조릿대가 급속히 번졌다고 입을 모은다. 


(조릿대의 확산으로 섬처럼 남은 시로미 군락(수꽃))


몇 해 전에서야 그 심각성을 깨닫고 조릿대 제거 방책을 찾기 시작했다.

일정한 지역의 조릿대를 인위적으로 제거한 다음 말들을 풀어놓았더니

조릿대의 새싹을 말들이 잘 뜯어먹어서 상당히 효과가 있다는 뉴스를 들었다.

국립공원지역이라고 해서 말을 기르지 못하게 한 단순한 발상이 문제였다.


한라산 고산초원의 수많은 희귀식물들이 이미 사라졌겠지만

요즘 눈에 띄게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종은 시로미인 듯하다.

시로미는 땅을 기는 줄기를 뻗으며 한 뼘 남짓한 높이로 자라므로 

키 크기 경쟁에서부터 허리 높이로 자라는 조릿대에게 밀린다. 

지금 시로미는 조릿대의 바다에 뜬 외딴 섬처럼 위태로와 졌다


(녹색 잎의 암꽃(왼쪽)과 자주빛을 띠는 잎의 수꽃(오른쪽)) 


한라산 1500미터 높이 이상의 고산초원에서만 볼 수 있는 이 나무는

열매에서 새콤한 맛이 나서 제주도 사람들이 시로미라고 불러왔다고 한다.

시로미는 꽃이 필 무렵에 숫그루와 암그루의 색깔이 확연하게 달라진다.

수꽃 개체는 온통 짙은 자주색으로 변했다가 꽃이 시들 무렵에 녹색이 돌아오고

암꽃이 피는 개체는 녹색이 좀 더 선명해지면서 잎에 생기가 완연해진다.

새나 물고기들이 번식기에 혼인색을 띠는 현상은 그러리라고 짐작이 되지만,

식물이 무슨 까닭으로 그런 색으로 변신을 하는지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시로미의 열매)


이미 많은 희귀식물을 잃어버린 한라산 고산초원에서 시로미는 최후의 보루다.

조릿대 세상이 된 고산초원이 한라여신의 가호와 제주 말의 왕성한 식욕으로

그 옛날 아름다웠던 천상의 꽃밭, 국립공원다운 모습을 되찾을 날이 기다려진다.

 

2018. 9. 4.